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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동학사의 봄. 길 없는 길

2019년 04월 09일(화)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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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크리스마스는 뜨거웠다. 영상 30도를 웃도는 폭염아래 산타클로스가 해변에 서있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 칸쿤에서 맞은 성탄절은 함박눈 대신 이글거리는 적도의 축제였다. 사람들은 밤늦도록 마시고 떠들며 저물어 가는 한해를 아쉬워했다.마야 문명지의 변경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은 낯설었다. 대륙을 횡단해온 종교가 그들의 방식대로 문명을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호텔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새벽에 잠이 깨어 화장실에서 시작된 소설읽기는 아침을 거르며 10시가 되었고 잠깐 요기 후 돌아온 방에서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길 없는 길’은 작은 전율이었다.경허선사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가 최인호(1945-2013)의 역작 4권은 다음날 저녁시간까지 소진하고서야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깨달음의 세계와 그 여정에서 벌어지는 본질의 관찰들. 세계적인 휴양지에서 성탄절에 불가의 큰스님 이야기에 풍덩 빠져 일정을 포기했다니. 왜 그랬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경허선사(1849-1912)는 한국 근 현대 불교를 개창하고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이며 서예가다. 법명은 성우(惺牛. 깨달은 소), 법호는 경허, 성은 송(宋)씨였다. 아홉 살에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해 한학과 불경을 학습했다. 공주 동학사에서 사서삼경과 불교강론을 섭렵했고 이후 9년 동안 동학사의 불경스승으로 추대되어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냈다.해인사와 오대산 금강산에서 정진하였다.

동학사 가는 길은 봄눈과 햇빛 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봄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세상은 봄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어지럽게 오고가는 인간사처럼 예보를 가늠할 수 없는 날씨였다.

▲ 계룡산 동학사 마당 석탑
▲ 계룡산 동학사 마당 석탑

경허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종의 대들보였다. 그에게는 세 개의 달이 있었다. 맏이 수월은 상현달, 혜월은 하현달, 만공은 보름달이었다.세 명의 제자는 경허를 이어 사방에서 꺼져가는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고자 동분서주했다.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헤월은 당할 자가 없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을 것” 이라며 이들을 아꼈다.

“마음달이 외로워 둥글어졌으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라는 임종게를 마지막으로 경허는 붓을 던진 뒤 입적했다. 그는 생불(生佛)이면서 자연인 ‘송동욱’ 으로서 매력덩어리 인간이었다. 숱한 일화와 통찰의 법어를 남겨 후세인들에게 진리의 동반자로 살아있다.

소설가 최인호가 그랬듯이 나도 한때 수도자로 구도의 길을 걷고 싶다는 맹렬한 유혹이 있었다. 교회를 서성거렸고 산사를 돌아다녔다. 정신의 허전함을 채워줄 생명수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세월이 흘러 모든 종교는 수평적 연결고리에 매여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보살예수’의 사상을 존중했고 이제 바람 부는 겨울산을 무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바다가 들었었다.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도 없이 끝이 없는 무애무진의 바다가 들어있었다. 아직도 샹그리라를 꿈꾸는 상상의 파도와 어리석음의 폭풍과, 분노의 격랑으로 항상 날뛰고 있다. 이 파도를 잠재우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세찬 물결을 잠재울 요량으로 동학사를 찾았다. 경허의 자취는 눈 내리는 봄날 고요한 숲길에 서려 있었다.

그는 동학사에서 참선에 들어갔다. 사리함이 이곳에 있는 연유다. 계룡산 무성한 숲 사이로 수 백 년 나이테를 간직한 느티나무 열주들 끝의 개천가 산사. 이제 경허도 그를 흠모한 소설가도 떠났다. 하늘가의 구름처럼 바위사이로 줄기를 이어오는 시냇물만 어디론가 정처 없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빈 거울에는 본래 거울이 없고

깨친 소는 일찍이 소가 아니다.

거울도 없고 소도 아닌 곳의 길가에

살아있는 눈 자유로운 술 한 잔 더불어 색이로다”

(제자 만공의 추모송)

▲ 동학사 가는길에 모셔진 경허당 선사 성우(惺牛)의 사리함
▲ 동학사 가는길에 모셔진 경허당 선사 성우(惺牛)의 사리함

계절은 봄이었으나 동학사는 겨울이었다. 바람에 우는 풍경소리를 따라 경내까지 올라갔다. 먼저 돌아 나온 마곡사도 매서운 한기는 마찬가지였다. 잎이 없는 빈가지에 꽃들이 걸려 나부꼈다. 파스텔 톤의 붉은 종이 연꽃들이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며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형상이 아님을 알게 되면 깨달음의 경지라는데 이직도 그 까닭을 모르겠으니 역시 나는 속인이다.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허한데

또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경허의 길 없는 길)

공주의 옛 이름은 웅진(熊津)이다. 곰나루 고을을 경허는 특히 좋아했다.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와 공주는 지금도 과거를 간직한 고장이다.가을날 경허는 백마강을 나룻배로 건너면서 풍류에 젖기도 했다. 동학사 뒷산에서 금강을 내러다보며 ‘귀거래사’ 를 자주 암송했다.

40대에 작은 벼슬에 종사하던 도연명(365-427)은 상관의 출영명령을 거부했다. “쌀 다섯말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며 낙향했다. 이때 쓴 귀거래사에 경허의 마음도 녹아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자

마당이 황폐해지고 있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제껏 내 마음과 몸을 위해 몸부림쳐왔거늘

무엇 때문에 그대로 고민하고 홀로 슬퍼하는가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장래의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길 잘못 들어 멀어지기 전에

길 가는 사람에게 길 물으면서

멀리 집을 보고 달려가세(중략)

문은 있으나 언제나 닫혀있네

지팡이 짚고 다니다 아무데서나 쉬면서

때때로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개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도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그대로 서성거리네.

돌아가자

세상 사람들과의 인연을 끓자

세상과 나는 서로 등졌으니

다시 수레를 몰고 나아가 무엇을 얻겠는가”

검은 장삼에 한손에는 시뻘건 고기를 매단 주장자를 들고 성큼성큼 걷는 경허의 모습은 분명 괴승이었을 것이다. 서슬퍼런 일제시대 순사들은 그를 잡아다가 패면서도 마지막에는 감화되어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일 없음이 오히려 나의 할 일(無事猶成事)” 이라고 설파한 법어는 경허의 대표적 선문답이다. 현세 모든 이들의 멍 때리는 시간은 나를 되찾는 순간이며, 마음을 헹구어 빨랫줄에 거는 것이며, 탐욕의 끈을 풀어 제치는 순간이다. 죽비 같은 울림이다.

최인호는 생전에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아끼는 육필원고로 ‘길 없는 길“을 꼽았다. 일간지에 연재된 이 소설은 120만부가 넘게 팔렸다. 종교가 배경이면 모두 외면하던 시절의 완전한 반전이었다.

경허는 조선후기부터 꺼져버린 선(禪)의 불꽃을 일구느라 생을 바쳤다.입적 30년 만에 한용운이 큰 스승의 일대기를 썼다. 만해는 꿈속에서 대선사를 대하는 느낌으로 경허의 행적을 더듬었다.

“주인은 꿈에서 나그네와 말하고

나그네는 꿈속에서 주인과 말하네

말하는 이 꿈속의 두 나그네

역시 꿈속의 사람들이지”

(휴정스님 삼몽사.三夢詞)

나에게 중년의 밤은 길었다. 참으로 길은 멀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고집했고 그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나는 어리석었다. 나의 작은 생각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부처의 손바닥을 돌아다녔다. 친구 호레이쇼의 품속에서 죽어가던 햄릿의 독백처럼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잠 못드는 사람에게 밤은 깊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법구경)

동학사를 내려오면 다시 속세다. 봄은 만산에 경허의 게송처럼 다가와 있었다.

“세속과 청산 그 어디가 옳은가

봄볕 있는 곳에 꽃피지 않은 곳이 없구나”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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