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칼의 도시, 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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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칼의 도시, 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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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堺)는 경계다. 지난 2천년 동안 일본의 서쪽 해안선이었다. 대륙에서 표류하면 열도가 시작되는 곳이다. 바다와 육지, 하늘과 땅, 영토와 영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발원하는 운명적인 곳. 그 경계에 섰다. 한반도와는 규슈가 더 가깝지만 17세기 전략적 전진부두는 사카이였다. 바다로 직통하면 간사이국제공항을 지나 쓰시마, 부산 앞바다로 연결된다. 중세와 근대 열도내부의 소용돌이가 일어날 때마다 대륙진출을 꿈꾼 필연적 해양 기지다.

북극의 한파 담벼락이 무너진 탓이었을까. 홍매화가 피어야 할 2월 사카이는 때 아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드문 일이다. 모든 것이 움추러든 탓인지 사람들의 발길은 현저히 적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오사카 외곽 서남쪽으로 붙어있는 도시, 이곳이 수많은 세월동안 전쟁과 군국의 기운이 넘쳤던 칼의 본거지였다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중세부터 발달한 사카이의 주조기술은 임진왜란 무렵 대규모 무기 제조창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우리와는 악연의 땅이었다.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들이 전해준 조총은 200여 곳으로 분산 통치된 지방 영주들의 이해와 맞아 떨어져 뎃포(鐵砲)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여기에다 전통 사무라이 일본도 역시 다양한 크기와 정교한 마무리가 더해졌다.

에릭은 머리를 뒤로 묶은 프랑스 청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는 5년 전 일본으로 건너와 칼을 만드는 작업에 젊은 날을 바치고 있다. 사카이 칼은 전 세계 요리사들의 로망이다. 원하는 종류를 셋트로 주문하면 3개월 제작기간을 거쳐 장인의 이름이 손잡이에 새겨진 명품을 받아볼 수 있다. 에릭은 주중에 칼 주조업체에서 일하고 주말은 전시관에서 방문객들을 안내한다.


▲ ▲사카이 호죠관에서 프랑스인 에릭과. ▲일본 장인들이 만든 수제 칼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원정군은 뱃길로 나서기 전에 사카이에서 칼과 조총을 지급받았다. 그 시절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신식 조총은 대부분 사카이산이었다. 조선의병을 괴롭힌 일본도역시 이곳 수공예 장인들이 만들어낸 무기였다. 도요토미의 고향 나고야에서 발진한 군사는 육로를 통해 오사카를 지나고 스미요시 아래쪽 사카이에서 침략의지를 다지며 출항했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사카이 역에서 가까운 호죠관(칼 생산전시관)거리는 '칼' 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인생을 거는 수많은 도생들이 문을 두드리는 곳이다. 전성기 때 이 도시는 빗방울을 맞지 않고 도보가 가능할 만큼 지붕이 연결되었다. 수많은 가게가 번성했다는 반증이다. "대형 상점들이 나란히 붙어서 가사(우산)가 필요 없을 정도의 오다레(보도)를 형성했다" 고 전해진다.

동양에서 칼은 오래전부터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제작해야 하는 일종의 신기(神器)였다. 옛 무사들은 혈맹을 맺을 때 혼을 담아 주조한 칼을 보냈다. 일본 전설에 칼은 악을 척결하고 화를 제거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번영과 행복을 가져오는 도구였다. 역사적 실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지긋한 나이의 현지 주민 가와자와씨가 들려준 속담이다. "교토는 입다가 망하고 오사카는 먹다가 기절하고 사카이는 짓다가 쓰러진다" 고. 물자와 돈이 모여들어 중세이후 일본의 중심을 지켜온 간사이 지역의 옛 영화를 짐작케 하는 말이다. 메이지 시대 우마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사카이 사람들은 지붕이 연결된 상점처마로 붐비는 거리를 다녔다. 현재도 인구 80만이면 오사카 위성도시로는 가장 크다.

사카이 칼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길고 적당히 짧게,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가볍게. 심혈을 기울여야 땅을 박차고 전진하는 힘이 생사를 가른다고 보았다. 직도와 휘어진 만도, 외날은 도, 양날은 검으로 나뉘어 각자 명인들이 따로 작업을 이어갔다. 이 도검들은 예리함을 넘어 아름다움까지 함께 겨룬다는 미학적 맹신이 그들의 정서 속에 혼재해 있다. 칼의 역설이다.

메이지 9년 폐도령(1877년)이 내려질 때까지 칼은 사무라이의 존엄이었다. 그 후 나쁜 기억들은 서서히 지워지고 오랜 세월을 거쳐 이름난 아트비즈로 재탄생했다. 요리 좀 한다는 이들에게 사카이 수제 칼은 필수 소장품이다. 살상의 역사마저 명품으로 포장시켜 세계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들의 상술에 놀랄 뿐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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